가끔은 글보다 단어에 더 집중해서 볼 때가 있다.
글도 물론이지만 단어의 힘 역시 대단해서, 어떤 단어는 보기만 해도 꿀꿀하던 기분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준다.
마치 음악과도 같다. 어떨 땐 그보다 더 크다.
단어를 읽고 이해하는 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나만의 그림 한 폭은 입체적이고 구체화되어 천국처럼 반짝거린다.
그래서 너무 힘든 일이 있을 때, 좌절의 순간, 지치고 힘겨울 때 생각해보고, 읽어보는 단어들이 있다.
1. 아침
아침엔 주로 어젯밤에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빵 한 조각과 따뜻한 차, 그리고 달달한 과일을 주로 먹곤 한다. 빵이 없으면 비스킷이나 시리얼도 좋다. 그래서 나에게 '아침'이란 맛있는 단어다. 과일과도 같은 단어. 달달한 하루의 시작.
2. 햇살
햇살 머금은 창가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영국에 살면서 깨달았다.
하루종일 비가 오는 그 특유의 정서가 내 취향이긴 하지만, 매일매일 그러다보면 기분도 어느 새 축축해지고 만다.
그래서 상상하는 것도 중요! 지금 창 밖에 안개가 자욱하고 꿉꿉한 먹구름이 잔뜩이더라도, 햇살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면 금세 따스해지는 느낌.
햇살이라는 단어는 반짝반짝 빛난다.
3. 봄
봄 봄 봄. 그 발음도 참 예쁜 봄. 예쁜 꽃에 가슴 설레이는 소녀같은 계절.
겨울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겨울과 봄의 그 경계가 가진 그 매력이 있다.
늘 새 학기의 시작과 맞물렸던 경험이 빚어낸, 상쾌하고 새로워지는 느낌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매년 봄이 되면 새 책과 새 친구를 만났던 추억들. 이제 곧 내 아이도 그런 경험을 쌓아가겠지.
벌써 1월 말이니 곧 봄이 오겠다. 이번 봄에는 아이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꼭 해야겠다.
4. 사각사각
의성어와 의태어 중 예쁜 말이 참 많다. 데굴데굴, 가랑가랑, 꼬르륵꼬르륵, 퐁당퐁당, 바사삭바사삭...
그 중에도 사각사각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도 들고, 정갈한 이미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갑자기 내 안에 잠재되어있던 학구적 열의가 불타오를 때도 있다. 가끔 이럴 때마다 뭐라도 해야겠어서 계획에도 없던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곤 한다. 나에게 사각사각이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마법같은 단어다.
개인적으로 연필의 사각거리는 느낌도 좋아한다. 샤프로는 따라갈 수 없는 연필만의 느낌이 있다.
연필을 좋아해서 어렸을 적엔 연필도 모으곤 했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새 것 그대로인 연필들을 아이에게 물려줄 때가 된 것 같다. 세상에. 우리 아이가 정말 많이 컸구나...
5. 내 이름
남편은 늘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 나는 그를 '오빠'라고 하거나, 아이 앞에서는 '아빠'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남편은 늘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준다.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가끔 부부동반이나 친구들과 모임이 있을 때 나를 그렇게 부르는 남편을 보고 대부분이 놀라워하는 걸 보고 이게 흔치는 않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낯간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언제 하루는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라고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듣기 좋아서."
나는 **엄마, 라고 불리는 것도 좋아한다. **아내로 불리는 것도 좋다.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나의 정체성도 결국은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준다는 건 정말이지 좋은 일이다.
남편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그의 깊은 사려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또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것이 굉장한 행운과 행복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고맙고, 사랑한다. 나도 그의 이름을 자주 불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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